위나라 등애란 누구인가? <사마의>를 보고 / 이 사람 멋지다!

2024. 1. 17. 12:56카테고리 없음

등애는 중국 삼국시대의 위나라 장군으로, 촉나라를 멸망시킨 공로가 있습니다.

정말 위대한 업적인데 잘 알려지지 않은 거 같습니다. 저도 사마의 드라마를 보고 알게 되었죠

삼국지 등애, 촉나라를 멸망시킨 위나라의 영웅

삼국지에서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가진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위나라의 등애(鄧艾)입니다. 등애는 촉나라의 강유(姜維)와 맞서 싸우며 북쪽의 국경을 지켰고, 결국 촉나라의 성도를 공략하여 삼국시대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등애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겠습니다.

생애 전반기

등애는 의양군(義陽郡) 극양현(棘陽縣) 출신으로, 부모를 일찍 잃고 여남(汝南)에서 송아지를 길렀습니다. 그는 지형을 살피고 그림을 그리면서 군사작전에 적합한지를 연구하기를 좋아했으나, 말더듬이여서 주위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았습니다. 이후 상계리(上計吏)를 지낼 때 사마의(司馬懿)를 만나 상서령(尙書令)이 되었습니다. 이후 수춘(壽春)을 시찰하던 등애는 운하를 통해 물을 끌어들일 구상을 하고 <제하론(濟河論)>을 지어 사마의에게 바쳤습니다. 이것이 받아들여져 운하가 완성된 후 수해가 줄고 군사들과 식량을 보내기가 편리해졌습니다. 조모(曹髦)가 등극한 후 방성정후(方城亭侯)에 봉해졌습니다.

북벌 방어

249년 강유가 국산(麴山)에 성을 쌓고 구안(句安)과 이흠(李歆)에게 지키게 하자, 등애는 곽회(郭淮)의 지시대로 성 부근의 물줄기를 끊어 성 안의 촉군이 항복하게 만들었습니다. 강유는 요화(廖化)를 보내 등애를 상대하게 하고 자신은 조성(洮城)을 공격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등애가 먼저 조성에 도착해 강유가 이끈 촉군을 무찔렀습니다. 이 공으로 토구장군(討寇將軍)으로 임명되고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습니다. 255년 강유가 왕경(王經)을 대패시키고 적도(狄道)를 포위하자, 재빨리 적도로 이동하여 포위가 풀어지게 한 공으로 안서장군(安西將軍)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강유가 다시 쳐들어오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등애는 방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가 얼마 후 쳐들어온 강유를 상대로 단곡(段谷)에서 승리했습니다. 위나라 조정에서는 등애를 등후(鄧侯)로 봉하고, 진서장군(鎭西將軍)으로 승진시키고 도독농우제군사(都督隴右諸軍事)를 겸하게 했습니다. 이후 강유는 257년과 262년에도 쳐들어왔으나 등애의 방어를 뚫지 못했습니다.

촉나라 정벌

263년 당시 정서장군(征西將軍)이었던 등애는 사마소(司馬昭)가 촉나라를 정벌하려는 계획에 찬성하지 않았으나 정벌이 확정된 후 결국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등애는 천수태수 왕기, 농서태수 견홍, 금성태수 양흔 등을 거느리고 정면에서 강유를 공격하고, 제갈서(諸葛緖)는 강유의 퇴로를 끊었습니다. 등애는 강유를 격파했으나 제갈서가 강유의 계책에 속아 강유가 검각(劍閣)으로 가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한편 주력 10만을 이끌고 있는 종회(鍾會)가 검각에서 강유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진군하지 못하자, 등애는 촉나라의 후방을 위협하여 강유 군을 물리고, 종회의 진군 통로를 열어주고자 하는 목적으로 제갈서와 함께 음평(陰平) 길을 통해 성도를 직접 위협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제갈서가 응하지 않고 종회에게로 가, 등애는 홀로 음평 길로 나아가 사람이 다니지 않는 험준한 지역 7백여 리를 거쳐 강유(江由)에 도착했습니다. 강유를 지키던 촉나라의 장수 마막(馬邈)은 지형만 믿고 방심하다가 위군이 나타나자 즉각 항복하였습니다. 제갈첨(諸葛瞻)이 면죽관(綿竹關)에서 완강하게 저항했으나 등애는 장수들을 독려하여 면죽관을 점령하고 제갈첨 부자와 장준(張遵) 등을 죽였습니다.

이 시절에는 아무래도 전쟁이 많아 장군이 유리할 줄 알았는데

등애는 농사를 하던 사람이 정책을 운영하고 장군까지 되니

정말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